배우 강수연이 별세하기 전 마지막으로 출연한 유작 SF 영화 '정이'가 공개된 후 사흘 연속으로 넷플릭스 전세계 순위 1위를 기록했다고 한다. 순위 합산 포인트로는 2위보다 두 배 이상 높으니 독보적인 1위이다. 그런데, 영화의 내용에 대한 평가는 매우 낮다고 한다. 이러한 결과가 언뜻 모순되는 것처럼 생각되지만, 내가 영화를 보고 난 후의 느낌으로는 '영화순위 1위'와 '작품에 대한 혹평'의 도저히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조합이 어느 정도 이해가 된다.
우선, 영화를 보면서 맨 먼저 받은 느낌은 "우리나라도 이런 수준의 SF 영화를 만드는 단계까지 왔구나' 하는 일종의 재발견이었다. 영화 전편에 거쳐 등장하는 미래 디스토피아의 모습이라든가 로봇을 복제생산 하는 시설의 구성, 로봇들간의 전투 장면 등은 이제까지 보아온 헐리웃 SF 영화들과 비교해 차이를 느끼지 못할 정도로 생생하고 실감이 났다. 그런 점에서컴퓨터를 활용한 영화제작 기술적인 면에서는 우리나라 영화계가 이미 상당한 실력을 갖추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영화의 전체 내용은 상당히 허술하고 덜 짜여진 느낌이 강했다. 화면 전개가 연구실과 공장, 그리고 전철 등 매우 한정된 공간에서 이루어지고 있어 매우 답답한 느낌이 든다. 등장인물의 수도 너무 적어 잠깐씩 얼굴 비치는 엑스트라 빼고는 불과 대여섯 명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뇌복제 내지 뇌이식, 군사용 AI와 로봇 등을 본래의 인간과 대비시키고, 인간 본성과 기계화의 갈등 구조 속에서 결국 휴머니즘을 택하고 마는 주인공의 절박한 심정과 미래 문명의 방향에 대한 심각한 고민을 주제로 깔고 있으면서도, 시도 때도 없이 튀어나오는 불필요한 농담과 가벼운 대사, 상황의 심각성에 전혀 맞지 않는 배우들의 익살스러운 표정을 뒤섞어 놓음으로써 영화에 대한 집중과 몰입, 공감이 어렵다.
'정이'가 시뮬레이션 전투를 할 때마다 마지막 단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실패하는데도, 문제의 원인에 대한 면밀한 분석이나 해결방법에 대한 치열한 연구 등의 내용은 하나도 없다. 무작정 야단치면서 다시 하라는 지시와 서너명의 연구원이 태블릿 등의 기기를 만지작거리는 비슷한 장면만 반복되기 때문에 전체적인 흐름 자체가 비약으로 느껴지고 "저렇게 해서 뭐가 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정이'에 대해 일부 영화평론가들이 "과학기술이나 미래주의 같은 주제를 피상적으로 훑을 뿐, 진심으로 탐구하기를 꺼린다"고 코멘트했다는데, 아마도 전달하고자 하는 주제가 영화의 내용과 자연스럽게 어울리지 못하고 물과 기름처럼 서로 겉돌고 있다는 느낌을 주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그런 비판에 나도 공감하게 됨이 마음 아프다.
그래도 다행스럽고 희망적인 것은 마치 헐리웃의 전유물처럼 여겨졌던 SF 부문에 우리나라 감독과 배우, 제작진이 참여해서 세계 1위의 영화를 만들었다는 그 사실 자체라고 본다. SF 쪽에서는 시행착오도 여러 번 있었지만, 넷플릭스의 '정이'라는 작품을 통해 K-드라마, K-영화의 지평이 더욱 넓어지고 있음을 증명한 것이 아닌가 싶은 것이다. 기술적으로 완성도가 높으면서도 스토리는 스토리대로 탄탄해서 영화순위 1위와 평점 1위가 공존하는 한국의 SF 대작이 조만간 나오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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